그날 내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은 ‘소금꽃 피었네, 갯골로 소풍가자!’라는 문구가 아니라 눈부시게 하얀 꽃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모습을 담아낸 포스터였다. 몇 달 째 공강 시간마다 사거리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로키를 연습하고 있지만 도심에서 하는 크로키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변화가 필요해.”
쥐고 있는 연필을 내려놓은 내 입에서 자연스러운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에는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였던 사람들의 복장이나 표정들도 몇 달이나 크로키를 계속 해 온 지금은 모두 엇비슷해 보인다. 다들 뭐가 그렇게 피곤한 걸까. 조금 더 다양하고 생기 넘치는 표정들을 그려보고 싶었는데, 미소를 띤 채 걷는 사람들을 찾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을 기다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한 자루만을 가방에 챙겨 넣고는 집을 나섰다. 가방이 가벼워서 그런지 아니면, 오랜만에 가보는 지역 축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역시나 갯골생태공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코스모스 꽃길도, 갖가지 재미있는 모양을 한 조형물들이나 염전도 아닌 축제를 방문한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메고 있는 가방에는 분명히 도시락이나 카메라 같은 오늘을 위한 준비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각자 세운 나들이 계획만큼이나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당장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 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코스모스 길을 따라 걸었다. 초가을인데도 갖가지 색깔의 코스모스가 공터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아이들의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다양한데다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크로키 대상이지만, 대학교 근처에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나는 아이들 한 무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기분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모래 대신 하얀 소금이 깔려 있는 놀이터 한 구석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놀다가 기운이 빠져 잠시 앉아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망대에 올라 갯골생태공원의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온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얘,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니?”
아이가 도리질을 했다. 엄마가 잠시 풍경 사진을 찍으러 다녀오실 동안 오빠와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또래 아이들을 만나 신이 난 오빠가 자신을 놀이에 끼워 주지 않는단다. 아이가 손가락질 하는 곳을 바라보자, 초등학교 사오 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노는 가운데서 아이와 꼭 닮은 짱구머리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가 혼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그대로 미아가 될 터였다. 나는 잠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로 결심하고는 아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언니, 화가예요?”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케치북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화가는 아니고 화가 지망생이지, 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려다가 그냥 유명한 화가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아이는 설레는 눈빛으로 빈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다가는 자기 얼굴을 그려 달라며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진관에 갔을 때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은 아이를 보다가 웃음이 나왔다.
어린아이를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이들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 새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며 티격태격하다가도 또 웃는다.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의 소매며 바지 자락에 묻은 소금꽃들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오래된 수탁의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삐거덕 하는 문을 열고 조용한 걸음걸이의 소녀 설화가 나왔습니다. 마을에서 설화라는 소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효녀로 소문이 나있었지요. 설화는 아픈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마을일을 돕고 바느질 삵을 받아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반찬은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사기도 힘들었답니다. 소녀 설화는 마을일을 도와드리며 반찬 조금씩을 얻어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녀가장이 된 설화의 착한 심성과 딱한 사정을 아는 마을사람들은 집에 있는 반찬을 조금씩 바가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의 반찬을 따로 담을 수 없어 그만 한 바가지에 나물들이 전부 섞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반찬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간 설화는 나물들이 섞인 바가지에 밥을 넣어 숟가락으로 비벼 상을 차렸습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밖에 상을 차리지 못했다는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지요. 설화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처음 보는 생소한 밥에 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그 맛도 맛있고 다른 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더 잘됐다고 설화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설화가 막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낯선 행색의 웬 남자가 설화의 집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행색을 보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듯싶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우선 물을 먹여 목을 축이게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달리 내 드릴 것이 없던 설화는 금방 얻어온 반찬들과 산에서 캐온 나물들을 섞어 고추장과 함께 내드렸습니다.
“소녀, 집안 살림이 누추하여 이런 것 밖에 내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남자도 생전 처음 보는 밥상에 잠시 놀랐으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밥에 들어간 나물들이 모여 이만한 영양가를 내는 밥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밥의 이름이 무엇이냐? 혹, 밥을 이렇게 만들게 된 경위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이 밥에 이름은 달리 없사옵니다. 사실….”
설화는 집이 가난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얻은 반찬이 우연히 섞여 밥과 함께 먹은 것이라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허허. 그것 참 딱하면서도 놀랄 일이구나. 사실 나는 궁에서 시찰을 나온 암행어사니라. 아까는 잠시 현기증이 나 쓰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를 만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런 천한 음식을 내 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밥과 함께 갖가지 나물들을 비벼먹는다... 비빔밥이 좋겠구나!”
“네? 비빔밥이요?”
“그래, 이 마을이 전주이니 전주비빔밥이 좋겠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암행어사가 다시 설화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왕실의 수라간 나인이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음식을 손수 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승낙한 설화는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설화는 갖가지 좋은 재료 중에서 나물과 고기를 가지런히 밥 위에 올려 수라상을 만들었습니다. 맛을 본 임금은 이름을 음식의 이름을 물었고 설화는 그 때 암행어사가 지어준 이름을 대었습니다.
맛의 우수함과 영양까지 두루 갖춘 전주비빔밥의 시작은 우연함이었지만 궁중음식으로 사랑받으며 전주의 제일가는 음식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야, 서울은 역시 죽이네. 사람들 때깔부터가 다르다. 우리 동네랑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로 갓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서울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고층 건물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했다. 고층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를 올라가려면 며칠 전에 올라가야 하나? 라는 촌티 팍팍 나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생소할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내가 서울이라는 곳 그것도 영등포구라는 이 네 글자를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라디오’ 그때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문세오빠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같은 시간이면 지지직거리며 주파수를 잡았고 스탠딩 불빛 하나만 켜놓은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밤 10시 5분부터 밤 12시까지 문세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신청곡을 기다리는 재미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를 끼적인 적도 있고 문세오빠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콧물을 쏟기도 했다.
라디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항상 라디오에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라며 말하던 곳이 영등포구 여의도동 사서함…… 이렇게 시작했다.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서울 하면 내가 늘 들어오던 영등포구 여의도동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영등포구 여의도동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역시나 특별했다. 사실 정신없는 도로와 사람들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더욱 특별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야야! 저 봐라. 저기 진짜 높은 건물 있다. 저게 다 몇 층일까?”
“야, 니 저거 모르나? 63빌딩!! 63빌딩이니까 63층이지.”
“니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나저나 63층? 이야. 저기 올라가면 서울 시내 다 보이겠다. 그렇지?”
“올라가볼래? 여기까지 왔는데 63빌딩도 안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시간을 보낸 채 도착한 곳은 63빌딩의 전망대였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서울 길. 그리고 그 속에 속해있는 나 자신이 신기한 순간이었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마치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저기 저 방송국! 저기에서 문세오빠 라디오 하잖아. 저기서 한참 있다 보면 오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보야, 지금 아직 오후 4시도 안됐는데 무슨, 오빠 라디오 밤에 하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 우리 여기 왔었다고 라디오에 사연 보내볼까? 그럼 당첨돼서 문세오빠가 우리 이름도 불러줄걸?”
63빌딩에서 내려와 한참을 문방구를 찾아 헤맸다. 우리 동네는 그냥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문방구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여기는 그 흔한 문방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서울이 문방구 하나 없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방구를 물어보니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니 문구와 여자아들이 좋아할 만한 머리핀, 작은 장난감까지 함께 팔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을 구경하다 예쁜 엽서 하나를 골라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이렇게 시작한 글에 우리는 참 손글씨로 어여쁘게 엽서를 꾸몄다. 긴장감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글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드디어 실려 가는 구나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엽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모른 채 혹여 채택이 안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도 되었다.
앗, 10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할 시간이야.
별이 빛나는 밤에. 문세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라디오를 한 참 듣는데 익숙한 이름과 글귀가 흘러나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그렇게 우리가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를 타고 흘렀다.
처음 영등포구를 찾던 날, 63빌딩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본 것, 라디오에 사연을 쓰게 된 이야기까지 라디오는 참 신기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타고 흘렀다.
라디오에 온 감성을 쏟았고 학창시절이 라디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속에는 가 본적이 있어도 가보고 싶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이 주소로 흐르게 될까.
붉은 입술,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 초연한 눈빛이 자못 경건하기까지 하다.
사각사각 꽃잎가루를 곱게 빻는다. 사각사각 더 곱게 갈아준다. 꽃잎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유난히 희고 맑은 피부에 분홍빛으로 분칠을 하며 단장을 한다. 붉은 입술은 꼭 다물어 더욱 붉어 보인다. 참빗을 이용하여 머리까지 곱게 빗으니 단장이 끝났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굳게 다문 입술을 조금 더 꼭 다물어본다.
5세가 되던 해 아비는 죽었다. 아비가 죽고 난 뒤 고약한 집의 민며느리로 팔려갈 뻔하다 겨우 빠져나와 경상도 우병사가 된 최경희의 첩으로 살기까지. 수많은 전투 속에서 자결에 이른 최경희의 빈자리까지 논개는 수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피비린내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닷새 전 집안일을 돌보는 곱단이를 불러 세웠다. 전에 곱단이가 가지고 싶다고 하던 비단 천을 내밀며 네 가락지와 맞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곱단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바꾸어 주었다.
“얼마 전 저잣거리에서도 가락지 몇 개 사지 않으셨어요? 요새 왜 이렇게 가락지에 욕심을 내신다요?”
“가락지가 예쁘지 않니? 예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고.”
“단단하다고요?”
“왜 혼례를 치를 때 가락지를 주고받는 줄 아니? 그게 바로 다 부부간에 단단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가자는 약속 때문에 그렇단다. 그래서 이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그런 거래요? 그래도 전 요 부드럽고 고운 비단이 더 좋구먼요.”
가락지를 받아들던 논개의 얼굴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열 개의 가락지가 다 채워졌다. 바람이 더욱 쌀쌀하게 불었다.
눈물은 보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역겨운 기름 냄새와 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방바닥을 짚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웃는 얼굴을 하고서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치장을 마쳤다. 누가 봐도 어여쁜 기생처럼 보였다.
밖은 시끄러웠다. 촉석루에서는 이미 흥이 한 판 벌어졌고 기름진 고기를 입가에 묻히고 먹는 왜장들이 보였다. 큰소리로 웃으며 술을 부어 마시는 꼴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용히 왜장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고하게 한쪽 다리를 올리고 분위기를 살폈다. 누구하나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나 쉬이 행동을 취했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쉬웠기 때문에 분위기를 잘 봐야했다.
결심에 선 논개는 남강이 유유히 흐르는 낭떠러지에 요염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장수들이었으나 아찔한 낭떠러지 앞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섣불리 논개 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때 늠름한 체구를 가진 왜장 하나가 걸어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었다. 바람에 몸을 실어 왜 장수를 낚아채듯 힘껏 안았다. 술에 취한 장수는 덩치에 못 미치게 휘청거렸다. 논개는 찰나의 순간 만 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열 개의 가락지 사이로 손가락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강 속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붉은 혼이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급히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런 자동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머리카락이 늘어져 더 초라해보였다. 여자가 차에 올라 탈 때 차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 할 때 남자가 짧게 ‘하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일본인 같았다.
달빛이 힘을 잃어 어스름했다. 낡았지만 붉은 빛이 선명한 벽돌 건물 앞에 여자는 멈추어 섰다. 여자는 차 안에서 머리를 빗었는지 아까보단 단정해보였다.
차마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밖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은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도록 쾌청한 하늘은 뜨거운 여름을 실감나게 했다. 어제 본 검은색 자동차가 다시금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자 혼자가 아니라 웬 꼬마아이와 함께였다. 아마 여자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어제보다 단정한 차림이었다. 검정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붉은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타케이. 잘 봐. 오늘을 잘 기억해둬.”
여자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경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어있는 방이었다.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을 나오고 나서는 인형으로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곳을 들어갔다. 실제와 가까운 비명소리와 인형의 모습에 타케이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무서웠는지 여자의 뒤로 숨으며 나가고 싶어 했다.
“타케이. 무섭니? 하지만 기억해야해.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서워하는 타케이의 손을 잡고 건물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날이 쾌청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는 이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엄숙함을 표했다.
타케이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곳을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케이. 유관순 열사 알지? 이분이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타케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아마 감옥이라는 곳은 죄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함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조용한 발걸음이라 다녀간 흔적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차안에서 여자를 모시고 가는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이렇게 자주 찾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타케이까지 데리고.”
“당연히 와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래도…….”
“유타, 여기에 계신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들의 뼈아픈 외마디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잇몸이 문드러져 이가 으스러져도 소리 한번 힘껏 지르지도 못한 분들이라고요.
지나간 시간이고 흘러버린 역사라고 해서 모른 척 눈을 돌리는 건 비겁해요. 좁고 어두운 무서운 곳에서 두꺼운 철제 창이 열리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핏물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해요.”
여자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낡은 지갑 속 흑백사진을 말없이 꺼내볼 뿐이었다.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짜증이 많고 늘 우울해하셨으며, 전쟁 때 팔 한 쪽을 잃어 보기 흉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입만 여시면 세상을, 정부를,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비관하는 말만을 하셨기에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는 것은 낙천주의자인 내게는 꽤나 고역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성공한데다가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셔서, 생활비로 쓰고도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매달 들어오시는데도 굳이 불편한 몸으로 밭을 일구시는 억척스러운 면도 싫었다. 술을 드신 날이면 좋은 옷을 입은 자식들이며 손주들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며 우셨고, 서울에 사시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시고 먼 김포땅 끝자락에 집을 지으셨다. 어렸던 나는, 그 괴팍한 성미의 할아버지에게 어른들이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지난 해 겨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술에 잔뜩 취하셔서 집으로 돌아오시다 넘어지셨는데, 그만 일어나지 못하시고 동사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강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일마다 애기봉에 오를 것을 제안하셨다.
“왜 하필 산에 올라요?”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통에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하시며 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할아버지가 실향민이며, 할머니를 북쪽에 두고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에 한쪽 팔을 잃은 할아버지는 아내와 아이들을 부탁했던 친구 집을 찾았다. 아내가 달려 나와 자신을 맞아 줄 줄로만 알았는데, 그곳에는 아이들뿐이었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감싸다 크게 다쳐 도저히 남으로 넘어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냥 자신을 버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하셨고, 워낙에 급박한 상황에 친구네 가족은 할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아이들만을 겨우 챙겨 남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불편하신 몸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형제를 열심히 키우셨지만, 한편으로는 북에 두고 온 할머니 생각에 매일같이 괴로워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셨으면 시신 수습도 제대로 못 한 것이, 살아 계시면 외롭게 혼자 살아 계실 것이 걱정이셨다. 자식들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북한에 계실 할머니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고 한다.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애기봉 전망대에 오르면 강 너머의 북한에 있는 마을까지도 맨눈으로 건너다 볼 수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나 접하던 북한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애기봉이라는 이름은 병자호란 때 혼자 강을 넘어 피신한 기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애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생은 평양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자신만 강을 건너고 평양 감사는 그대로 청나라에 잡혀가자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봉우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후에 이것이 이산가족의 모습 같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이름 없는 봉우리에 애기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나는 어쩌면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강을 건너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장난감을 들고 있던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우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그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다면 할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셨을까. 할아버지의 고개. 나는 애기봉에 그런 이름을 붙여 보기로 했다.
아이를 잃은 지 벌써 닷새가 조금 넘었다. 집 앞 골목에서 놀던 아이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달도 기울어진 밤. 어스름히 비추는 가로등이 자꾸만 깜박거린다.
아이를 찾으려 경찰, 미아신고센터 등 발을 넓혀 수소문해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실마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유괴라면 협박을 하는 전화 한통쯤은 걸려왔을 법한데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그렇다면 아이의 실종일까. 일곱 살 난 아이가 혼자서 길을 잃었다면 누군가 보호를 하거나 신고를 했을 텐데 동네에 아이의 흔적은 토막 난 시간처럼 깨끗했다.
“생김새가 유사한 아이를 목격했다는 제보전화입니다. 사례금을 먼저 묻는 걸 보니 약간 의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일단 만나보심이…….”
사람들은 남들의 아픔에 치명적인 순간을 노리곤 한다. 장난전화라는 무책임한 단어에 피가 마르고 심장이 덜컥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돈을 노린 하이에나들처럼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는다는 기분이 이럴까. 아내는 자신이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반 실성을 하며 통공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자리에 누웠다. 아이의 이름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찰은 아직 일주일을 넘기지 않은 상황이니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노력을 해보자고 했다. 물론 그들도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는 듯했다.
아이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보호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 다음의 최악의 상황은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왜 불길한 상황에서의 생각은 자꾸만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드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아빠’하며 찾을 것을 생각하니 밤이 깊어가도 좀처럼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아이가 어디에서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부모가 되어서 어떻게 발 뻗고 잠들 수 있을까.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경찰에서도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발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이제는 조금 느슨해졌다.
따르르르르릉. 전화 한 통이 울렸다.
화순의 한 절이라고 했다. 우연히 아이를 찾는 전단지를 보았는데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아이와 비슷한 것 같아 전화를 했다고 했다. 몇 차례 장난전화를 받았지만 매번 아이를 보호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오면 심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런데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곳이 절이라니. 장난일리는 없겠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만약 정말 아이가 있다면 어떻게 그곳에서 보호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에서는 장난기라고는 없었고 꽤나 진실했다. 우선 아이는 잘 있다는 말을 먼저 하는 걸 보니 안심이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아이가 어떻게 갔을까이다. 차로 족히 10Km는 가야할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간다고 해도 아이혼자 쉽지 않은 거리인데.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임에도 자꾸만 의심이 가슴 속에서 콕콕 솟아올랐다.
급하게 차를 세워두니 저 멀리서 아이가 뛰어왔다. 아이의 상태는 괜찮은 듯 했다. 눈으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니 5일간의 마음고생이 사라지니 급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아이를 어떻게 보호하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듣기위해 스님과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많이 놀라셨지요? 빨리 연락을 드리지 못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아이도 잘 보살펴주시고.”
스님은 천천히 칠성바위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여 몸이 천근만근이었으나 아이를 찾았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이것이 칠성바위입니다. 언뜻 보면 그냥 7개의 원반석으로 보이나 자세히 보면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아이를 어떻게 보호하게 되었는지를 묻었는데 스님은 대뜸 북두칠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다고 스님의 말을 자를 수 없었기에 말없이 예에. 하고 듣고만 있었다.
“북두칠성은 북극성과 같이 나그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지 않습니까. 아이가 저를 찾아오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치이지요.”
스님은 자꾸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간절한 마음이 북두칠성의 밝은 빛을 받아 아이를 이쪽으로 움직이게 하였을까.
자꾸만 졸음이 쏟아져 스님의 이야기가 희미해진다. 이제 겨우 아이를 어떻게 발견하였는지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희미해지고 몽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