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추억이 묻어있는 그 벤치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흔적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그 벤치에 홀로 앉아본다. 바람이 불었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언제 지났는지 모르는 간이역엔 조그마한 움직임도 없다. 간이역 가봤냐고 수줍게 묻던 열두 살 난 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까만 얼굴에 다정하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철로를 걸으며 은주의 손을 잡아주던 지석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철로를 걸어본다.
소란스럽던 교실에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선생님 뒤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차렷, 선생님께 인사! 반장의 구령에 맞춰 아이들이 일제히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고 했다. 서울에서 왔고 이름은 이은주라고 했다. 선생님은 은주에게 빈자리에 앉으라고 하셨고 그 자리는 지석의 옆자리였다. 지석은 서울에서 온 여자아이가 짝이 된다는 것에 괜히 부끄러워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자신에게서 혹시나 시골냄새가 나지 않을까 킁킁거리기도 했다. 은주는 작은 목소리로 안녕? 이라고 했고 지석도 안녕이라고 답했다.
은주의 집은 지석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물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물동이동인 회룡포에 사는 은주와 지석은 줄곧 마을 냇가로 나가서 놀거나 뿅뿅다리를 건너며 놀았다. 밖에서 자주 놀아서인지 지석은 얼굴이 까맸으나 은주는 함께 놀아도 얼굴이 하얬다. 다리를 건너며 장난을 치던 지석은 볼이 발그레 져서는 은근슬쩍 은주에게 용궁역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은주야 너, 간이역 가봤나?”
“간이역? 어디?”
“왜, 저쪽으로 쭉 가다보면 용궁역 나오는데, 가봤나?”
“아니. 안 가봤어. 용궁역이라고? 재밌겠다! 가보고 싶어. 간이역이면 꽤 재미있겠다.”
간이역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지석은 은주에게 철로를 걸어보자고 했다. 은주는 그러다 갑자기 기차가 달려오면 어쩌냐며 무서워했고 지석은 남자답게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철로 끝을 걸었다. 바닥으로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손목을 때리는 게임이었다. 지석의 눈에는 두 눈을 꼭 감고 아슬아슬하게 철로 위를 걷는 은주가 참 예뻤다. 그리고는 자신이 먼저 균형을 잃고 떨어지며 은주에게 슬쩍 손목을 내밀었다. 은주는 웃으며 지석의 손목을 살짝 때렸다.
가을바람이 살랑하고 불자 철길 옆에 난 코스모스가 바람 따라 흔들렸다.
“지석아. 실은 나 또 이사 간다. 아빠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한 대.”
지석은 놀란 마음에 그만 철길 옆 벤치에 주저앉고 말았다.
“원래는 여기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다시 올라가는 거였는데. 그렇게 됐어. 너무 아쉽다. 너랑 여기에서 재밌는 시간 많이 보냈는데.”
“가족이 다시 올라가면 가야지 뭐. 언제 올라가는데?”
“아마 내일 학교에 인사만 하고 올라갈 것 같아.”
그렇게 은주는 떠났다. 지석은 차마 은주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은주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아도 끝내 지석의 모습은 운동장 너머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십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은주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철길을 걸었다. 간이역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어쩐지 조금은 쓸쓸해보였다. 벤치에도 철길에도 사람의 흔적이 드문드문 보였다.
철로를 걸으며 은주의 손을 잡아주던 지석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철로를 걸어본다.
어 어. 균형을 잃은 은주가 휘청하고 철로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누군가 은주의 손을 잡았다. 지석이다.
지석은 여전히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많이 보고 싶었다며 했다. 그리고는 반가운 손을 내밀었다. 은주도 싱긋 웃으며 지석의 손을 잡았다.
봉화마을의 깊고 깊은 숲 속 작은 연못이 있었어. 이 작은 연못에는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자랑하는 은어가 살고 있었지. 그리고 작은 연못 옆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어. 늘 푸름은 간직하는 소나무 밑에는 작은 송이 하나가 있었지.
은어가 처음 작은 연못에 살게 되었을 땐, 숲 속의 맑은 공기와 작은 새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맑은 물에 사는 친구들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좋았어. 그렇게 매일 친구들과 유유히 헤엄치며 숲 속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지. 그런데 물이 너무 맑아서 그런지 연못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너무 잘 띄게 되었어. 그래서 친구들과의 이별도 잦아지게 된 거야. 은어는 이곳의 생활이 점점 지겨워졌어. 맑은 물과 친구들 그리고 숲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재미가 없어진 거야.
그런데 연못 옆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옆에 살고 있는 작은 송이도 이 숲 속 생활이 지겨워 진 건 마찬가지였어. 늘 소나무 옆에서 소나무의 수다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향이 강하여 숲 속 동물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하였지.
그렇게 은어와 송이는 점점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어. 그래서 은어는 송이와 함께 다른 마을로 떠나기로 했어. 소나무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이 슬펐지만 송이를 보내주기로 했어.
그렇게 다른 마을로 여행을 떠난 은어와 송이는 어느 날 작은 냇가에서 미꾸라지 친구를 만나게 되었어. 미꾸라지는 헤엄을 치며 맑았던 물을 흙탕물로 만들어 자신을 숨기곤 했지. 그 모습을 본 은어는 너무 부러웠어.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고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은어는 미꾸라지와 함께 이곳에 남기로 했어.
혼자 남은 송이도 또 다른 친구를 찾아 계속해서 길을 나섰어. 그러다 정말 멋진 사과나무를 발견하였어. 사과나무는 향긋한 향기와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지. 송이도 사과나무 옆에서 살기로 마음먹었어. 그렇게 봉화를 떠난 은어와 송이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꾸려나갔어.
송이는 냇가 흙탕물에서 미꾸라지와 함께 마음껏 헤엄을 쳤지. 그런데 맑은 물에서만 살던 은어는 흙탕물에서 사는 것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어. 아름답던 황갈색의 빛깔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빛나던 지느러미도 축 늘어져 볼품이 없어졌지. 이런 상황은 송이도 마찬가지였어. 늘 소나무 밑에서 소나무의 영양분을 받고 살아가던 송이에게 사과나무는 아무런 영양분을 줄 수 없었어. 그래서 향은 물론 수분도 사라지며 점점 말라가기 시작하였어. 그리고 사과나무는 송이 말고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 그래서 송이는 늘 외로웠지. 소나무처럼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했지만 사과나무는 그렇지 않았어.
그렇게 은어와 송이는 봉화에서 살던 기억을 그리워하게 되었지. 그리고 은어와 송이는 봉화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어.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거든,
은어와 송이는 그렇게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다 보니 아름다운 빛깔과 고유의 향을 잃어버렸지. 그래서인지 좀처럼 동물 친구들 모두 은어와 송이 보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어. 봉화에 있었을 때에는 연못이나 소나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을 보고 기뻐하고 아름답다고 했었거든. 은어와 송이는 더는 아름답지도 향기가 나지도 않는 자신들이 볼품없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다시 봉화로 돌아가게 된 거야.
봉화의 작은 숲 속은 여전히 맑은 공기가 가득했고 물은 투명하게 반짝였어. 새들은 작은 소리로 노래를 했고 동물친구들은 즐거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 작은 연못의 친구들은 다시 돌아온 은어를 반갑게 맞이했고 소나무도 다시 돌아온 송이를 반갑게 맞아주었어.
그렇게 맑은 물에 지내게 된 은어는 빛깔과 윤기를 되찾게 되었고 송이도 소나무의 영양분과 사랑을 받고 아름다운 향을 퍼뜨리게 되었어.
동물친구들은 아름다운 빛깔과 향을 내는 은어와 송이를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었고 은어와 송이를 보기 위해 봉화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어. 그래서 은어와 송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은어와 송이도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작은 숲 속의 삶에서 행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해.
201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초겨울 즈음의 일이었다. 옆 동네에서 건너 온 소식으로 아침부터 마을이 들썩였다. 어린이대공원 안의 동물원에 있던 어린 여우 두 마리를 소백산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옆 동네의 아궁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허이구, 그게 삼십 년 전인가에 멸종했다던 그 여우 아니여?”
“맞아요, 맞아. 서울대공원에서 번식 시키려고 그렇게 노력했다던데 정말 아깝게 됐어요.”
“여우? <어린왕자>에 나오는 그 여우?”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할머니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니야, 아가. 구미호가 와서 죽었단다.”
그 때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불여우나 불여시로 불려왔으며, 구미호 전설의 주인이기도 한 토종 붉은여우였다. 온몸이 황적색의 털로 덮여 있는 이 붉은여우는 원래 우리나라에 아주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옛날 얘기 속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뒷산의 호랑이처럼 말이다. 호랑이만큼이나 여우가 많았던지 여우를 소재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구미호 얘기였다.
이렇게 많았던 붉은여우는 안타깝게도 밀렵되거나 쥐약 먹은 쥐를 잡아먹어 야생에서는 멸종되었었다. 옆 동네 아궁이에서 그 새끼 여우가 죽은 채로 발견되기 몇 년 전에 서울동물원에서 40년 만에 토종 여우의 번식을 성공시켰고, 이에 힘입어 야생에 여우 한 쌍을 방사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쌍의 여우 중 암컷은 아궁이에서 죽었고, 수컷은 이로부터 며칠 뒤에 덫에 걸린 채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구미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붉은여우는 백 년, 혹은 천 년을 살기도 하며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사람을 유혹해 생간을 빼 먹기도 하는 요물이었다. 여우가 와서 죽은 뒤로, 할머니는 밤이면 밤마다 어렸던 내게 불여우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불여우는 아홉 개나 되는 꼬리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나그네를 유혹했다가, 나그네가 잠들면 쇠고랑 같은 손톱으로 생간을 빼 내 먹는다고 했다. 구미호가 인간이 되려면 사람의 간이 백 개나 필요해서, 나그네만 보면 해치려 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지친 할머니가 먼저 잠이 드셔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럼 서울동물원에서는 구미호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할머니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여우를 상상했다. 여우는 아마 몸집은 아주 커다랗고 온 몸이 붉은 색 털로 뒤덮여 있으며, 날카롭고 긴 발톱을 가졌을 것이다. 입가에는 항상 피가 묻어 있고, 어쩌면 그 입에 갓 빼낸 싱싱한 생간이 물려 있을지도 몰랐다. 밤이면 늑대처럼 주둥이를 길게 빼며 울거나 처녀 귀신같은 모습으로 변해 숲을 돌아다니며 사냥감을 찾을 것이었다. 밤에는 절대 집 밖에 나가지 않겠다고 몇 번씩 다짐하고, 문을 꼭꼭 잠근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텔레비전에 여우가 나왔다.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붉은여우가 소백산자락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 너머에 붉은여우가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붉은여우가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화면 속 여우의 모습이었다. 붉은여우는 작은 몸집에 날씬한 다리, 길고 탐스러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설 속의 주인공이라기에는 너무도 앙증맞은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대공원에 있는 붉은여우를 보러 가기로 했다. 번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이제는 대공원에서 아기 붉은여우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산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아마 산 속에서는 붉은여우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응? 가보자! 나 진짜 가고 싶단 말이야!”
또 시작이다. 수원으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어 난생 처음 여자 친구가 생긴 것도 좋고, 여자 친구가 애교도 많고 예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 여자 친구가 나를 정말 좋아해서 주말만 되면 놀러 가자고 성화인 것도 남들에게는 자랑거리다. 물론 놀러 가서 사진 찍는 걸 나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면 좋은가. 사귄 지 두 달째. 내 통장의 잔액도 이만 원. 안된다고 하자니 울음을 터뜨릴 게 분명하고, 된다고 하자니 비용이 얼마나 들지가 걱정이다. 유미가 데이트할 때 돈을 안 쓰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나는 용돈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라 일단 가까운 곳으로 가면 안 되냐고 애매하게 말이라도 꺼내보기로 했다.
“응? 화성행궁이 뭐가 멀다고 그래?”
“시외버스 타는 거면 충분히 멀지.”
유미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돈이 없다는 걸 들킨 건지 아니면 처음으로 싸우게 되는 건지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유미가 웃는다.
“아, 뭐야. 너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구나. 화성은 화성시가 아니라 수원에 있어, 바보야.”
그 날 나는 남한산성은 남한에 있고 갈매기살은 갈매기 고기라는 등의 놀림을 온종일 당해야 했다.
화성행궁에 갈 건데 왜 연무대에서 만나자고 했나 했더니, 연무대에서 화성행궁까지 행궁열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맨 앞 칸이 용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열차가 들어왔다. 화성열차를 본 적은 있어도 탄 적은 없다는 유미가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우리 옆에서 엄마 손을 붙잡고 있는 유치원생들이랑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여 웃음이 나왔다. 열차는 빨간 가마 모양이었다. 유미가 임금님처럼 앉아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며, 나는 수원시민에게는 열차가 무료라니, 일단은 살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차는 삼십여 분을 달려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화성행궁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원래는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인데 건물 하나를 제외한 모든 시설이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삼십 여 년 전부터 꾸준히 해 온 복원운동으로 이제는 제법 아름다운 모양을 갖추게 되었단다. 매표소 앞에 선 나는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요금표를 보고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궁중 전통문화 상설 체험장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엽전 다섯 개를 가져와 내밀었다. 여기서는 이게 돈이란다. 농담인가 했더니 정말이었다. 엽전을 내고 떡메를 치거나 도자기, 한지 체험 등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궁중 의복 체험이었다.
“너 저것 때문에 오자고 한 거지?”
“당연하지!”
이것도 돈을 내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엽전으로 계산하게 되어 있었다.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성행궁만의 방식이 재미있기도 했다. 제멋대로 내게 장군 옷을 골라 입힌 유미가 머리에 가채까지 쓰고 왕비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건 좀 불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여자 친구가 왕비 옷 입은 걸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둘이 찍은 커플 사진이 왕비와 장군 옷을 입은 채라니 세상에 우리 같은 커플도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가 나를 쿡쿡 찔렀다. 글쎄, 이번에는 떡메를 치고 오라고 한다.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며 자신 있게 나섰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린애 팔뚝만 한 머리가 달린 떡메를 더운 날에 내리치고 있자니 금방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엽전 한 닢을 내고 노동력까지 바쳐야 하는 건가 했더니 내가 친 떡에 고물을 묻혀 순식간에 인절미를 만들어주었다. 꽤 많은 양이라 점심까지 해결되었다. 인절미까지 공짜로 줄 리가 없는데, 이쯤 되니 뭔가 수상하다. 유미는 아직도 손에 쥔 엽전 두 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잠잘 때, 밥 먹을 때 빼고는 입을 쉬는 일이 없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우렁찬지 가까이 있으면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느냐. 옆집 똥개가 새끼 낳은 일부터 아랫동네 아낙이 바람난 일, 나라님 흉보기, 어제저녁 밥상의 반찬, 죽다 살아난 할아버지 이야기, 조상님 묏자리까지 인간세상 일은 다 관여하고 다녔다. 남의 일이라면 상대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말을 나르는 탓에 피해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훈장님 댁에 모여 앉아 불만을 토로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귀가 따가워 일할 수가 없소.”
“그가 안 해도 되는 말을 옮긴 탓에 나는 아직도 마누라와 전쟁 중이라네.”
“이대로는 안 되겠소.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의 얘기를 들어주지 맙시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도 못 듣는 척했다. 들어주는 이가 없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마을을 떠날 결심을 했다.
“좋아. 말을 하면서 전국 팔도를 유랑하는 거야. 내가 직접 들을 사람을 찾아서 이야기하고 다니자.”
그는 그렇게 봇짐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 세상은 넓고 말할 사람은 많았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말을 지어내고 옮기며 행복하게 몇 년을 보냈다.
전국방방곡곡을 다니던 어느 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정동진에 도착하였다.
“풍광이 아름답구나. 신선이 따로 없네. 이제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되겠어.”
이야기할 사람을 찾아 바닷가를 걷던 그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향해 다가가자, 파도가 바닷가에 선 나무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래서 토끼가 용왕님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파도의 목소리가 신기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파도의 이야기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단 말이야? 전부 들어 말하고 다녀야지.’
그는 바위에 쪼그려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파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가 다리가 저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슬쩍 다리를 펴다가 솔잎을 밟고 말았다.
“어머나, 깜짝이야.”
솔잎의 소리에 놀란 파도가 저만치 바닷속으로 도망쳤다.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파도야. 도망치지 말고 더 이야기해다오. 뒷내용이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구나.”
하지만 파도는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안 돼요. 제가 했던 말은 용궁의 비밀이랍니다. 오로지 해안가의 나무만이 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용궁의 비밀이라니, 더없이 탐나는 이야기였다. 용궁의 비밀을 전국 팔도에 말하고 다닐 생각에 잔뜩 들뜬 그는 파도를 향해 외쳤다.
“내 그 이야기를 위해 기꺼이 나무가 되마.”
그러자 그는 다리가 땅에 박히고 피부는 점점 딱딱해졌다. 손에는 싹이 돋았고 머리칼은 초록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소나무가 되자 입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말하는 데에 눈이 멀어 영영 말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에게 입이 없으니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소나무가 되어 아직도 정동진 해변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때는 백제시대. 어둠이 얕게 깔리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커지던 그 순간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드리운다. 휘리릭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여인이 서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왕실의 사람은 아닌듯하다.
드넓게 펼쳐진 연꽃 사이에 청초하게 서있는 여인은 왕실의 여인이 아닌가. 고운 비단 옷에 단정하게 빗어 내린 검은 머리카락. 달빛을 받아 더욱 고운 얼굴빛은 희고 여리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가운데 놓인 정자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빛을 받아 아름답고 아름답게 피어난 연잎은 맑은 이슬을 머금고 있다. 그 가운데에 왕실의 여인이 서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 때 검은 그림자가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여인이 기다리던 사람인 듯했다.
궁남지는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무왕이 선화공주를 위해 만든 인공정원으로 천한 신분의 사람이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항상 어둠이 짙게 깔리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온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처음 만난 곳도 이 궁남지이다. 그래서 무왕과 선화공주만큼이나 이 둘에게도 이곳 궁남지는 특별한 공간이다.
선화공주는 왕가의 무왕과 함께 이곳에서 달을 보는 것을 즐겨하였으나 왕실의 여인들과 산책하는 것도 즐겼다. 그래서 이 여인도 궁남지를 몇 번 들른 적이 있다. 그러다 선화공주는 궁남지 연못 한가운데에 핀 연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연못 한가운데에 핀 꽃을 꺾으려면 연못으로 들어가야 했고 신하들도 무르고 나온 터라 꺾어다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마마, 이 연못 근처 마를 팔던 남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꽃을 꺾어달라는 청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러자 왕실의 다른 여인이 반기를 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곳은 저렇게 마를 파는 신분의 천한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그냥 돌아가는 것이 맞는 듯 하옵니다.”
그러자 선화공주가 단호하게 말했지요.
“그런 말 마십시오. 마를 파는 사람이라고 어찌 다 천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지 궁금하니 이곳에 올 수 있으면 얼굴 한번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마를 팔던 남자는 궁남지에 들어와 선화공주에게 꽃을 꺾어다 주고 왕실의 여인을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 여인과 남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를 많이 닮아있었다. 그만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은 이루어지기기도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이곳에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진흙과 닮은 남자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을 닮은 여인.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과 닮은 이 둘의 사랑도 둘처럼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딸애가 유치원에서 신선이라는 단어를 듣고 왔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선이 뭐냐고 묻는다. 분명 유치원선생님에게도 똑 같이 신선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테고 선생님께서는 다정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을 텐데 이 녀석은 내게 꼭 되묻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는 마치 처음 듣는 다는 듯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에 최대한 친절히 대답해주려고 한다.
“신선은 말이야. 산신령알지? 그런 것처럼 상상 속 인물이야. 도를 닦으면서 인간 세계에서 유유자적하며….”
아이에게 말을 해주면서도 아차 싶었다. 아이는 유유자적이 뭐야? 도를 닦는 게 뭐야? 하며 이맘때 쯤 아이들이 그렇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로 퍼부어 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쩐지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했다.
“빈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음, 신선은 왠지 좋은 것 같아서.”
역시 어린아이라도 감은 있는 듯했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하는 삶만큼 매력적인 삶이 없다는 것을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캐치해 낸 듯했다.
“응, 빈이 말이 맞아. 신선은 아주 경치가 좋은 곳에서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란다. 그래서 아주 경치가 멋진 곳에는 신선이 노닐다 간 곳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아이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신선이니 유유자적 하는 삶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퇴근 후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넥타이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앉아있는 신세가 어쩐지 처량해졌다.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크게 동경하며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쉬는 것을 마다할 사람 없고 노는 것을 싫어할 사람도 없었다. 때마침 아내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아이에게 오늘 하루에 대해 물었다. 아이는 당연히 엄마에게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신선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나와 똑같거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겠지라며 넥타이를 푸는데 아내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빈이 저번에 아빠 엄마랑 무진정 갔다 온 거 기억나? 거기가 신선이 놀던 곳처럼 아름답다고 했었는데.”
“아! 맞아. 엄마랑 아빠랑 거기에서 사진 많이 찍었지!”
역시 엄마는 위대했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는 고려하지 않은 백과사전같은 말만 늘어놓았는데 아내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의 이해를 도왔다.
“응, 그러고 보니 지금쯤 무진정에 꽃도 피고 녹음이 푸르러 더없이 예쁘겠다. 봄은 이래서 좋아. 발길 닿는 곳 어디든 예쁘고 멋있잖아. 그래서 말인데 여보, 이번주 주말에 무진정 다녀올까? 저번에 갔을 때는 사람도 너무 많고 해서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것 같아.”
이번주 주말이면 사회인 야구단에서 중요한 야구시합이 있는 날인데 차마 아내와 아이의 눈빛을 똑바로 보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내 대답도 마저 듣지 않은 채 벌써 룰루랄라였다.
어쩔 수 없이 야구단의 중요 경기에 참석 할 수 없다는 비보를 알린 채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무진정으로 달렸다.
와아. 아내와 아이의 입에서는 동시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연못에 소박하게 자리한 정자가 기품 있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야. 무진정 무진장 아름답네.”
아내는 어쩐지 썰렁한 농담까지 곁들였다. 사실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 야구 시합을 제쳐두고 온 것이라 입이 삐죽 나와 있던 차인데 무진정의 멋들어진 경치와 아내와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정말로 신선이 풍류를 즐기다 간 것처럼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무진정 앞에 서니 신선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선 시대 문신 정도는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아빠가 신선 같아.”
빈이는 저 멀리서 달려오며 나보고 신선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순간 그렇게 늙어보이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 아이의 함박웃음에 나도 따라 웃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무진정 무진장 아름답다 정말.”
아내와 나는 오랜 시간동안 한 곳을 바라보았다.